탕이의 역사이야기, 오늘 이야기 할 역사적인 인물은 '나는 죽음이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라는 말로 자신을 정의한 과학자. 원자 폭탄을 만들어 미국을 강력한 핵 무기의 보유국으로 만들었지만, 종국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씁쓸한 말년을 맞이 해야 했던 비운의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입니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해외 개봉을 앞 두면서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한 이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한 관심이 연일 회자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개봉일은 8월 15일에 예정되어 있는데요, 아마도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 하게 된 계기가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에 투하된 '리틀보이'와 '팻맨' 으로 인해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이번 영화는 오펜하이머 역할의 킬리언 머피 부터 시작하여,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와 같이 한 명 한 명이 각 영화의 주연을 맡아도 이상 하지 않을 만한 배우들의 초호화 캐스팅 부터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변화를 초래한 핵 무기라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을 개발한 인물의 일대기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 시대 최고의 스타 감독, 그리고 명 배우들의 열연. 미국과 대략 한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개봉하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 입니다.
8월 15일 개봉을 앞둔 영화 오펜하이머를 기다리며,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알아 보는 스포일러 탐독 시간(?) 을 가져 볼 까 합니다.
1904년 4월 22일 뉴욕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 부모님의 불타오르는 교육 열정 아래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학습능력과 뛰어난 교육환경아래 미래의 이론 물리 학자로서의 자질을 차근차근 다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광물 표본의 수집, 물리학, 화학, 문학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학교에서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 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물수집하며 그 특유의 성질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졌고 이는 나중에 핵개발의 영감을 얻어 내는 초석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당대 물리학의 거장 들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맥스웰, 톰슨, 러더퍼드, 보어, 채드윅, 왓슨 등 우리가 과학 교과서를 펴면 한 번쯤을 볼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이 즐비 하여 있었습니다. 허나 이론 중심이 아닌 실험 중심의 학풍은 그와 잘 맞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고민하고 힘들어 하던 오펜하이머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리기 까지 했습니다. 그가 지도교수 였던 패트릭 블래킷의 책상에 독사과를 올려 놓아 그를 독살하려 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 하죠.
교수독살미수사건에 영향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던 오펜하이머는 그 후 케임브리지를 떠나,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로 옮기게 됩니다. 이곳에서 고전물리학과 대비되는 큰 축을 이루는 양자역학의 대가인 페르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등과 어울리며, 그의 물리학적 소양이 확대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이를 육군이 관리 하도록 하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레스리 그로브스 장군과 함께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의 설계와 제작에 박차를 가 하였습니다. 그는 경제 대공황 시절 좌파운동에 참여 하여 한 때, 공산주의자로 의심 받기도 했고 한 때 사랑했던 여인 ' 진 태트록' 이 좌익 사상을 표방하는 인물이었기에, 미국 상부에서는 그가 이 토록 중요한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었으나 그로브스 장군의 지지 하에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행착오 끝내 만들어진 핵 무기 '리틀보이'와 '팻맨' 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 되어 태평양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핵 무기의 상상 이상의 위력과 참혹한 참상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고 '나는 죽음이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라는 말과 함께 핵무기에 대한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련과의 냉전 체제가 심화 됨에 따라 수소폭탄의 필요성이 대두 되자 그는 이를 극력하게 반대 하였습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의 독자적 개발에 성공하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성공하게 되자 핵무기 반대론자 이자, 공산주의자로 의심 받던 오펜하이머는 점차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을 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 아내, 딸과 함께 버진아일랜드로 향한 그는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고,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며 노후를 보냈으며, 1965년 후두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1967년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하였습니다.
'[MON] 탕이의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이의 역사이야기_오펜하이머(맨하튼 프로젝트) (7) | 2023.07.31 |
---|---|
탕이의 역사이야기_선조 (5) | 2023.07.03 |
탕이의 역사이야기_세조 (1) | 2023.06.26 |